어른이 된 나는 어느 해 4월 그곳을 일부러 다시 찾았다. 아! 콧등을 스치는 온갖 내음들이 정신을 아득하게 한다. 어머니 손길보다 더 다사롭게 느껴지는 봄철 꽃바람은 잊히지 않는 추억으로 나를 싣고 간다.
지루한 겨울, 늦게 시작하는 봄
내 고향은 원산의 영흥만(永興灣)에서 시작하여 포천, 의정부 그리고 서울을 거쳐 서해안까지 길게 전개되는 좁고 낮은 골짜기, 즉 추가령 지구대로 무서운 삭풍의 통로가 된다. 그래서 겨울은 일찍 시작되어 3월까지 지루하게 계속된다. 그리고 4월이나 되어 시작하는 봄은 짧게 끝난다.
마을은 농촌이라고 하지만,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정확히 표현하면 ‘농산간 마을’이 맞을 것이다. 이런 곳의 기후 특징은 겨울이 매섭게 춥고, 눈이 많이 자주 내린다는 것이다. 요즘은 눈이 그리 많이 오지 않지만 1960~1970년에는 눈이 무릎까지 푹푹 빠질 정도로 많이 내려 어린 나이에 초등학교 가는 길은 그야말로 험난한 ‘학교 가는 길’이었다.
여름철 폭우가 무섭지만 겨울의 폭설은 더 길고 독하고 무섭다. 빗물은 흘러 내려가면 끝이기에 폭우는 그치면 한숨을 돌릴 수 있다. 그러나 눈은 계속 쌓이기 때문에, 나와 자연을 감금하여 고립시키는 등 뒤끝이 길고 무섭다.
하얀 옷을 입은 수만, 수십만 눈송이 대군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 세찬 바람에 흩날리며 사선으로 우리 마을과 산과 들을 감싸고 공격해 들어오는 백설의 공습, 모두를 질리게 한다. 순식간에 산과 들, 나무, 집 - 하늘을 제외한 모든 물상을 흰색으로 도배하고 폐쇄하여 감금한다.
적설량은 장독대 뚜껑 위에 쌓인 눈의 높이를 가늠하면 대충 짐작할 수 있다. 한자 이상 눈이 쌓이면 4-5일은 마을 전체가 고립된다. 신작로 나가는 길은 눈으로 막힌다. 하루에 몇 번 다지지 않던 버스는 그나마 끊기고, 군용차량만 간혹 통행할 뿐이다. 폭설에 이어 영락없이 매서운 강추위가 엄습한다. 동장군과 얼어버린 폭설! 농촌 마을은 이제 본격적인 겨울철로 접어든다.
그래서 내 고향의 겨울은 폐쇄와 결박의 계절이다. 북쪽 협곡에서 불어 내려오는 강추위와 삭풍이 산촌 사람들의 발과 몸을 더욱 움츠러들게 하여 묶어버린다. 마루 밑 검둥이조차 추위를 이기지 못해 온몸을 동그랗게 똬리를 틀고 칩거하는 계절이 내 고향의 겨울이다.
열 가구 남짓한 산간 마을의 ‘전설 같은 겨울 서정의 이야기’는 매우 늦게까지 이어진다. 3월 말이나 되어서야 동네에서 신작로로 나가는 산 아래 응달의 꽁꽁 얼어버린 ‘얼음 눈길’이 녹아내린다. 고향 마을은 그 길이 완전히 녹아야만 봄이 시작된다. 숫자로 시작되는 봄과, 눈과 피부로 느끼고 보이는 봄이 엄청 다른 곳이 바로 내 고향이다.
고향의 봄, 그리고 선인과의 대화
고향 마을은 평범한 농산간 마을이다. 평지로 내려서는 산 경사지에는 다랑논이, 골짜기에는 좁고 긴 고래 논과 밭들이 올망졸망 빈틈없이 펼쳐진다. 그 마을에는 나만의 비밀스러운 공간이 있었다.
추동리 노루목 집에서 창수초등학교 가는 방향으로 산 아래턱에 좁다랗고 구불구불 나 있는 소로가 산모롱이를 휘감아 돌면 산 쪽으로 움푹 패 들어간 삼십여 평 크기의 공간이 있다. 듬성듬성 잔디와 잡풀이 나 있는 경사진 곳이다.
4월 중순이 되면 잔디 사이로 원추리, 명이, 으아리 등이 제멋대로 움을 돋는다. 길 쪽 방향만 트여 있고 삼면이 낮은 능선으로 싸여 있어 아주 아늑한 곳으로 혼자 호젓하게 있기에 제격이다. 지독하던 겨울이 끝나고 바람결에서 한기가 완전히 사라진 봄날, 그곳에서 나만의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그런데 그곳은 겨울 지나 언 땅이 해동하는 4-5월부터 여름 사이, 경사진 곳의 흙더미가 무너진 흙의 속살에는 선인들의 다양한 생활 흔적이 얼굴을 드러내곤 한다. 분청자기 조각, 기와 조각, 녹슨 수저, 그릇 조각…… 아, 동네에 사시던 조상들의 흔적이다.
그러면 나는 그곳 잔디에 누워 그런 생활의 흔적들을 남기며 살았을 마을 선인들의 생활 모습, 마을의 정경 등을 생각하고, 여러 상상을 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예를 들면 고대로부터 현세까지 그곳에서 있었을지도 모를 칼부림 등 전투, 싸움, 각종 살육으로 마지막 순간에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하고 스러져 간 영혼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리고 그들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하는 등등, 별별 엉뚱한 생각을 하곤 했다.
어른이 된 나는 어느 해 4월, 소년 시절에 찾던 그곳을 일부러 다시 찾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시절의 추억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유년기, 아동기, 소년기까지 외롭게 지낸 나의 희로애락과 지난 이야기를. 혼자서 고민하고, 판단하고, 극복하던 나는 조언자, 상담자는 늘 없었다. 외롭고 힘들었다.
그래서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화전을 일구며 어렵게 살았을 사람들을 생각하며...... 눈 아래 펼쳐지는 논밭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연록의 눈 초가 싹을 틔우고, 진달래가 봉오리를 터뜨리는 봄날, 선인들의 옛이야기를 궁금해하고 먼저 살다 가신 그들과 대화를 나누곤 했다.
봄날의 대화
사르륵 사르륵 초록이 싹트는 소리
제비꽃 냉이꽃 향기 바람결에 흘러오는
흙내음 풀내음……
그리고 아득해지는 의식
파아란 하늘이나 바라보며 아
연록의 풀밭에서 한식경 가량 잠들어……
꿈결에서
이곳 태고 이래 육신을 묻어버린
떠도는 영혼으로부터
많은 얘기를 듣고 싶다.
님들의 숨결이 바람 속에
한 줄기 내음으로 다가오는 오늘
혼자 왔다, 사연 안고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외롭게 떠난
그 거룩한 이야기와 진실에 관한.
-저자 지음
그리고 진달래가 분홍 꽃잎을 터뜨리고 멀리 내려다뵈는 고래 논에 백로가 먹이 찾는 모습이 한가로운 4월, 나만의 공간에 누워 할미새, 종달새, 꾀꼬리, 때까치가 서로 사랑을 나누는 소리를 들으며, 어려운 현실과 안개 속의 미래를 생각하며 온갖 상념에 젖곤 하던 소년 시절의 나를 찾았다.
아! 그때 콧등을 스치며 다가오는 온갖 내음들 - 진하지는 않으나 콧등을 스치는, 바람에 실려 오는 황토 내음, 부식토 내음 그리고 지분보다 진한 봄 내음이 정신을 아득하게 만든다. 온몸이 흙 속에 녹아 들어가 하나가 되고 싶었던 나른하고 행복한 순간, 어머니 손길보다 더 다사롭게 느껴지는 ‘봄철 연분홍 꽃바람’은 아련하지만 잊히지 않는 추억으로 나를 싣고 간다.
5월의 개구쟁이
5월의 산과 들은 온통 봄으로 꽉 차 있다. 써레질을 위해 물을 잔뜩 채워 놓은 논에는 우렁이와 개구리가 많이 나와 있다. 진흙 속에 있던 우렁이와 개구리는 기온이 높아져 수온이 따뜻하게 오르면 겨울잠에서 깨어나 수중 먹이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아이들은 써레질을 아직 하지 않은 무논을 찾아 고무신을 벗어들고 맨발로 논을 헤매며 본격적으로 우렁이, 개구리 사냥을 시작한다. 햇볕이 따뜻한 봄날에는 개구리들이 체온을 높이기 위해 논두렁 위 풀 섶에 나와 있다가 사람 인기척에 놀라 논 속으로 풍덩 뛰어들어 진흙 속에 숨는다.
이때가 잡을 찬스다. 뛰어들어 흙탕물이 된 물이 가라앉아 맑아지면, 개구리가 숨은 논바닥 속의 흔적을 어림짐작으로 찾아 손으로 와락 움켜쥐고 잡아서 주전자에 넣고 뚜껑을 닫으면 된다. 이미 개구리를 여럿 잡아 주전자에 담아 놓았다.
벌써 눈 초(풀 등에서 움튼 연초록 싹)이던 풀잎, 나뭇잎들이 제대로 성장한다. 신록의 계절이 완연하다. 벚나무, 개나리, 진달래는 이미 지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꽃의 계절이 끝난 것은 아니다. 때를 잊은 철쭉꽃, 음지에 있는 산벚꽃, 병꽃이 피어나고 있다. 늦철쭉 꽃 옆으로 보라색 뻐꾸기 꽃, 엉겅퀴 꽃이 탐스럽게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뻐꾸기 꽃의 도톰하고 부드러운 곁가지 순을 툭 꺾어 껍질을 쭉 까 내리고, 입에 쏙 넣는다. 뻐꾸기 순의 달착지근하고 부드러운 육즙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때맞춰 바람까지 부니 목이 타던 차라 시원하다.
원추리나물, 홑잎 나물이 지천이다. 이 나물들은 향과 식감이 좋고 부드러워서 맛이 그만이다. 참깨 소금 들기름으로 무친 원추리나물과 홑잎 나물은 봄의 일미이다. 그렇게 개구쟁이들의 봄은 서서히 지나가고, 검푸른 녹음의 여름으로 다가간다.
서재원 교수
. 창수초등학교, 포천중, 포천일고, 서울대 졸업
. 한국방송 KBS 편성국장, 편성센터장(편성책임자)
. 차의과학대학교 교양교육원장, 부총장
. 포천중.일고 총동문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