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는 아이들 세상 아침 공기가 상큼하고 신선하다. 산 위로 해가 올라오자 따뜻한 기운이 만발한 살구꽃 향기를 울안으로 감싸안아 향긋하다. 화창한 5월이다. 엄마는 바쁘시다. 떡 시루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는 증편을 널찍한 소쿠리에 쏟아 놓는다. 술 내음이 섞인 맛 좋은 증편 냄새가 민호 입을 괴롭힌다. 아랫마을 혼인 잔치에 가져갈 품앗이 떡이다. 증편을 가득 담은 소쿠리를 머리에 이고 대문을 나가다 엄마가 민호에게 당부한다. 천자문 공부 잘하고, 닭들 툇마루에 올라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툇마루 더럽히고 똥 싸면 지저분해서, 원! 그리고 집 잘 지키고. 동네 어른들이 모두 아랫마을로 향하는 오솔길에 줄줄이 들어선다. 동네는 이제 대여섯 살 꼬맹이들만 남았다. 이제 아이들 세상이다. 앞집 명수가 쪼르르 달려와서 민호를 꼬드긴다. 어른들도 안 계시고 하니 건넌 마을 숲속 시냇가에 가서 재미있게 놀자. 물고기, 가재를 잡아 구워 먹고, 찔레 순, 밀대 나물 순도 꺾고, 잔대도 캐고......구미가 당기는 제안이다. 엄마 당부 말씀이 좀 켕기지만, 기꺼이 명수 뒤를 따른다. 느티나무 옆을 지나다 일태네 집을 들여다보니 일태는 없고, 동생 미순이와 언니 정순이가
닭들의 힘든 겨우살이 “꼬꼬댁 꼭꼭” 한밤중 닭 우는 소리가 요란스럽다.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저놈 잡아라!”고함치며 옆문을 걷어차고 맨발로 뛰어나가는 아버지. 닭장 방향이다. 자다 깬 어린 민호,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무슨 일이지, 온몸에 소름이 돋고,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엄마 품에 안긴다. “아마 살쾡이가 내려왔나 보구나. 아버지께서 갔으니 이제 아무 일도 없을거야.” 작년 겨울 일이 생각났다. 그때도 살쾡이가 내려와 툇마루 밑에서 잠자던 검둥이를 물어가려던 것을 아버지가 쫓았다. 검둥이는 겁에 질려 ‘끼이잉 낑낑’ 비명소리를 내며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시골에서는 삵쾡이를 호랑이 새끼라고 부르기도 한다. 얼룩무늬의 살쾡이는 무섭고 영리하다. 눈이 오고, 추위가 닥쳐 산과 들이 온통 꽁꽁 얼어버리면, 살쾡이는 물론 족제비, 멧돼지, 오소리, 너구리 등과 같은 짐승들은 산과 들에서만은 먹이를 모두 구할 수 없다. 그래서 밤이면 허기진 배를 채우려 마을로 내려오곤 한다. 추수하다 남겨놓은 이삭을 주워 먹거나 사람들이 저장해 놓은 곡식, 고구마, 감자, 푸성귀 등을 훔쳐 먹거나, 큰 짐승은 가끔 닭이나 개 같은 가축을 먹잇감으로 물어간다. 그래서 민
조카로부터의 느닷없는 주례 부탁이 글을 쓴 배경이다. 주례사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생각하다 보니 먼저 떠오르는 분이 있었다. 조카의 친정어머니이다. 사촌 누나인데 그녀는 고인이 되었다. 한국전쟁은 많은 가정을 해체했다. 전후에는 어쩔 수 없이 큰집 작은집이 함께 살아야 하는 대가족도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출가하기 전까지 같이 살아 어린 시절을 함께 했다. 기억 속의 어떤 혼례 민호가 대여섯 살 때쯤이다. 농가 작은 안마당에서 혼례가 열리고 있다. 아주머니 한 분이 신랑과 함께 초례상에 고운 보자기로 싼 목각 기러기를 올려놓는다. 머리를 짧게 깎은 깡마른 전통 혼례 복장의 신랑, 아리따운 신부가 초례청에 들어서자, 흰 광목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의 사회로 혼례가 시작된다. 신랑 신부가 서로 절을 하는 교배례에 이어서 합환주를 마시는 합근례가 이어지고, 초례청 공중 위로 닭이 날아오른다. 그리고 이어지는 왁자지껄한 덕담. 민호는 친구 명수와 함께 외양간 구유 위에 올라가 혼례가 끝나기를 고대하며 잔치 음식을 기다리고 있다. “명수야, 누나 참 예쁘지?”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구경하던 명수. “네 누나 엄청 힘든가 봐, 땀을 흘리며 떨고 있네. 불쌍하다
슬픔의 힌트 이상한 느낌에 눈을 떴다. 잠이 덜 깬 눈으로 윗목을 바라보니 엄마가 벽에 기대 숨죽여 흐느낀다. 민호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며 와락 겁이 난다. “팔자가 그거밖에 안 되는 걸 어떡하나. 그만 해!” 볼멘소리로 아버지는 엄마를 달래고 있다. 뭔가 있구나, 생각하니 불안하다. 다시 잠으로 빠져들었다. 모내기 철이다. 논에 물을 미리 대고, 바닥을 뒤집어 무르게 만들고 평평하게 해두면, 벼 아주 심기가 좋다. 느티나무 밑 고래 논에서 ‘워-워-, 워디 워디, 이랴-이럇.’ 황소를 어르고 달래며 써레질하는 민호 아버지. 봄인데도 구슬땀을 흘린다. 바닥을 뒤집어 놓으니 동면하던 곤충 유충 등 벌레와 식물 등 새들의 먹거리가 많다. 강남 갔다 돌아온 제비가 활강하듯 논으로 내려와 먹이를 낚아채려다 써레질하는 황소의 워낭 소리에 화들짝 놀라 하늘로 ‘쌩’하고 오른다. '짤랑짤랑 짤랑짤랑’, 경쾌한 워낭소리가 동네를 꽉 채우며 흐르고 있었다. 멀리서 ‘뻐꾹, 뻐꾹, 뻑뻐꾹', 뻐꾸기 소리가 메아리 되어 돌아온다. 하릴없이 툇마루에서 꾸벅꾸벅 졸고 앉아 있던 여섯 살 민호. 내일이 모내기 날이라는 엄마 말씀에 신바람이 났다. “옥순아, 나물하러 가자. 반찬 몇
사내애들은 여자애들이 아는 척도 안 하고, 쌀쌀맞게 군 게 몹시 화나고 서운해서 앙갚음했다. 여자애들은 아직도 울상이다. 남자애들이 얄밉다. 그러나 그리 싫지는 않은가 보다. 모 방송은 2013년 여름에 ‘독일 루르 공업지대’에서 제작한 '광부, 간호사 파독 50주년 가요무대 특집'을 두 차례 방송했다. 꽃다운 나이, 간호사로 독일에 가 40여 성상을 보낸 100여 명의 어머니 합창단의 ‘들장미’로 시작되는 특집은 동시대를 살아온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성인이 된 이 이야기 주인공 민호 씨는 직장에서 정년퇴직하기 직전,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나름의 이유 있는 기억과 정서로 인해 애틋한 감회에 젖었던 바 있다. 넉넉지 않은 집안의 소녀로 시골에서 똑똑했던 아이, 스물이 채 안 된 어린 나이에 간호사로 간 아이, 그 아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가슴 속에는 그 어린 나이에 무슨 이유로 머나먼 곳으로 떠나갔을까,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궁금증, 호기심이 자리하고 있었다. 수줍은 동심 동네 아이들이 사내아이 계집아이 정답게 어울려 초등학교에 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동네를 벗어나 학교로 가는 오솔길에 들어서자, 사내아이는 사내아이끼리 계집아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