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에 쓰는 서재원의 사람이야기]

주례사 일화

차의과학대학교 교수, 전 KBS 프로듀서 · 아나운서

 

 

조카로부터의 느닷없는 주례 부탁이 글을 쓴 배경이다. 주례사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생각하다 보니 먼저 떠오르는 분이 있었다. 조카의 친정어머니이다. 사촌 누나인데 그녀는 고인이 되었다.

 

한국전쟁은 많은 가정을 해체했다. 전후에는 어쩔 수 없이 큰집 작은집이 함께 살아야 하는 대가족도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출가하기 전까지 같이 살아 어린 시절을 함께 했다.

 

기억 속의 어떤 혼례

민호가 대여섯 살 때쯤이다. 농가 작은 안마당에서 혼례가 열리고 있다. 아주머니 한 분이 신랑과 함께 초례상에 고운 보자기로 싼 목각 기러기를 올려놓는다. 머리를 짧게 깎은 깡마른 전통 혼례 복장의 신랑, 아리따운 신부가 초례청에 들어서자, 흰 광목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의 사회로 혼례가 시작된다.

 

신랑 신부가 서로 절을 하는 교배례에 이어서 합환주를 마시는 합근례가 이어지고, 초례청 공중 위로 닭이 날아오른다. 그리고 이어지는 왁자지껄한 덕담. 민호는 친구 명수와 함께 외양간 구유 위에 올라가 혼례가 끝나기를 고대하며 잔치 음식을 기다리고 있다.

 

“명수야, 누나 참 예쁘지?”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구경하던 명수.

“네 누나 엄청 힘든가 봐, 땀을 흘리며 떨고 있네. 불쌍하다!”

걱정한다.

 

민호가 뚜렷하게 기억하는 장면은 짧은 머리, 큰 키의 신랑이 엄마에게 기러기 한 쌍을 드리고, 닭을 날릴 때 ‘아들딸 열둘 낳아 천년만년 잘 살거라’하며 깔깔 웃으며 소리치는 하객, 상기된 신부의 환한 모습, 누나 동무의 웃는 얼굴, 즐겁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푸드덕거리며 앞마당 지붕 위로 나는 닭의 모습 등이다.

 

꿈 많고 재주 많던 아가씨

누나 방은 마루 건넛방이다. 저녁이면 거의 매일 동갑내기 동무가 놀러 왔다. 그럴 때면, 누나는 으레 민호를 부른다. 누나들 틈새에서 놀다가 무릎 위에서 졸고, 내쳐 잠자는 경우가 많다. 누나들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속닥거리다 깔깔 웃고, 자수와 뜨개질을 하다가 아이를 데리고 실뜨기나 손 그림자놀이 등을 했다.

 

누나는 뜨개질, 자수 솜씨가 동무에 비해 한 수 위다. 손재주가 어찌나 좋았던지 대바늘, 코바늘 털실 뜨개질은 못 하는 게 없이 빠르다. 벙어리장갑은 물론이고, 목도리, 스웨터 등을 떴다가 풀어서 다시 뜨고...... 털실이 귀해서 부족한 게 문제다.

 

민호의 벙어리장갑, 귀덮개도 누나 솜씨다. 누나는 특히 자수에 정성을 기울였다. 반짇고리, 커다란 뜨개질 소쿠리 - 누나가 아끼는 물건 목록이다. 하얀 광목에 알록달록 색실로 이름을 알 수 없는 꽃들의 뿌리·줄기·잎·꽃잎 전체를 색색의 상징적인 덩어리로 수를 놓아 밥상 덮개, 창문 가리개, 각종 받침대, 베갯잇 등 생활용품이나 소품을 만들었다.

 

그리고 서로 자랑을 하고 아이에게 묻는다. “네가 보기엔 어느 게 예쁘다고 생각하니?” 아이는 뜨개질, 자수 모두 별 흥미가 없다. 입장이 곤란해서 아무 대꾸 없이 조는 척하다 잠들곤 했다. 뜨개질, 자수가 누나들 혼수품 마련의 일환이었다는 것을 안 것은 나중이었다.

 

민호는 실뜨기, 손 그림자놀이, 동서남북 놀이는 재미있다. 길이 1미터쯤 되는 실로 두 끝을 이은 테로 여러 모양을 만드는 놀이가 실뜨기 놀이이다. 둘이 마주 앉아 테를 번갈아 가며 손가락으로 걸어 떠서, 실 모양이 바뀌는 과정을 즐긴다. 상대의 손가락에 걸린 실을 다른 형태로 만들어야 하며, 그렇게 하지 못하면 진다. 누나의 실뜨기 실력은 빠르고 분명하다. 동무가 이긴 적이 거의 없다.

 

실뜨기 놀이에 심드렁하고 피곤해지면, 누나들은 이불 위로 서서히 몸을 누이며 손 그림자 만들기를 하였다. 호롱불로부터 좀 떨어진 거리에서 손목, 손바닥, 손가락, 주먹 등으로 벽 위에 그림자를 만드는 누나, 손의 움직임에 따라 흰 벽지에 그려지는 각종 모양의 그림자 세계는 마술의 신기에 가깝다. 솜씨가 좋을 때는 토끼 모양, 새 모양 등도 만든다. 잘 만들어 내는 사람을 가리는 놀이인데, 상도 없고 벌도 없이 그냥 재미로 한다.

 

누나들이 손 그림자놀이에 민호는 황홀경으로 빠져든다. 손과 빛만으로 벽에 다양한 형태의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누나. 호롱불의 불빛에 비취인 두 손과 주먹, 손가락 그림자가 하얀 벽지에 그리는 그림의 세계는 신비롭다. 민호에게는 상상과 호기심의 세계였다. 손의 위치와 각도에 따라 그림자가 어떻게 바뀌는지를 상상하고 기대하는 즐거움이 컸다. 마치 가을 밤하늘 별들의 세계를 볼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누나는 부사관 군인에게 시집을 가서

이곳저곳 떠도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꿈 많고 재주 많고 순수했던 누나는

소녀 시절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유쾌하고 풍부한 감성의 소녀

누나는 민호 손을 잡고 봄이 오는 산과 들, 구석구석 온 동네를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아이도 흰 적삼에 검정 치마를 예쁘게 차려입은 누나 손을 잡고, 업히고, 안겨 다니는 게 좋았다. 동네 앞 한국군, 미군 등 군부대에 납품하는 미루꾸(밀크사탕) 공장에 들러 문을 열고 기웃거릴라치면 어떤 아저씨와 부사관 군인이 손에 밀크사탕을 몇 개 쥐어준다.

 

동네를 이리저리 다니다 다리가 아프면 누나에게 투정을 부리기 시작한다. 어린 동생을 이길 재간이 없는 누나.

 

“둥기둥기, 어부바 해줄게.”

못 이기는 척 아이를 업고 얘기 주머니를 풀어 놓는다.

 

“옛날에 어떤 할아버지가 저기 저 산길을 가다 바위 굴에 있는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데려다 우리에서 키웠단다.”

누나는 조금 뜸을 들이며 민호가 자는지 기색을 살피다가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런데 어느 날 밤에 소만한 호랑이가 ‘휙, 휙’ 바람 소리와 함께 지붕을 뛰어넘으며 새끼 고양이 우리 앞에서 ‘어흥’ 소리를 내는 게 아니겠어.”

민호가 무서워서 누나 등짝에 얼굴을 묻었다.

 

“숨도 못 쉬고 있던 식구들이 밖이 조용하길래 나가보니 호랑이가 우리를 뜯고 새끼 고양이를 데리고 간 게 아니겠니? 동네 사람들은 저기 두껍바위 산으로 호랑이가 갔다는 거야.”

 

동네에는 두껍바위 산에 호랑이가 산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었다. 누나 이야기를 듣다 콧등을 간질이는 5월의 봄바람, 풀내음, 흙내음, 찔레꽃 향기, 향긋한 누님 살냄새에 취해 민호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삶은 숙명의 질곡 속으로, 그리고 누나는 변화했다

누나는 부사관 군인에게 시집을 간 이후 이곳저곳 부평초처럼 떠도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당시 직업군인 가족의 삶이 보통 그랬다. 박봉에 쪼들리는 생활에 아이가 하나, 둘 생김에 따라 더욱 생활은 어려워지고...... 가난, 고난, 희생이라는 숙명의 질곡 속의 삶이 이어졌다.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과 같은‘숙명’을 헤쳐 나갈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누나의 남편, 즉 민호 매형은 계절이 바뀔 때면 어김없이 범절 있는 문안 편지와 동태 몇 마리, 고등어 통조림 몇 통을 보내왔다. 그럴 때면 부모님은 신이 나서 초등학생 민호에게 조카사위 편지를 낭독시켰다. ‘기체후일향만강(氣體候一向萬康 : 어른께 올리는 편지 첫머리의 문안 인사. ‘기력과 건강이 내내 좋으시겠지요’의 뜻)‘으로 시작하는 알 수 없는 한자투성이의 편지는 매번 내용이 비슷하였고, 낭독은 고역이었다. 그 후 그녀는 베트남 파병 군인의 아내, 퇴역한 부사관 아내로서 힘든 삶을 살았다.

 

영원한 것은 없다. 보통은 변화하며 상흔을 남긴다. 꿈 많고 재주 많고 순수하고 감성적이던 그녀 성상은 서서히 거칠게 변화하였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가 점점 깊어지고 트라우마를 또 남겼다. 나이 들어가며 그녀는, 소녀 시절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있었다.

 

남은 이야기

의뢰받는 주례사에서 사랑을 담보로 한 ‘책임, 의무, 헌신’이라는 흔한 ‘속박의 굴레’를 씌우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의 약속, 도리와 인연에 충실한 삶이 자칫 잘못하면, 일방에게 무한 책임과 의무를 지우게 할 수도 있다. 그 일방은 약자인 여성이 될 가능성이 크고, 그것이 행복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살아 온 시대적 환경, 인생관, 가치관 등의 패러다임을 모두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현대의 가정, 부부의 보편적인 덕목과 가치인 ‘행복, 사랑, 존경, 배려, 자유, 평등’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어려움을 지혜롭게 극복했으며, 가족에게 최선을 다했고, 가정을 운영하는 데에 성실했다. 그러나 전후 어려운 경제 환경, 가난과 제도, 일반적 인식 등에 얽매인 숙명적 삶에서 헤어날 길은 없었다. 

'꿈, 의지, 성상, 감성’은 사라지며 늙어갔다.

 

 

 

서재원

● 창수초등학교, 포천중, 포천일고, 서울대 졸업

● 전 한국방송 KBS 편성국장, 편성센터장(편성책임자)

● 차의과학대학교 교양교육원장, 부총장

● 포천중·일고 총동문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