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더라도 옆에서 망을 보는 것도 똑 같은 공범이 되는 거구나!’
지금부터 육십오 년 전, 지금 생각하면 난 어리숙한 아이였고, 의도치 않게 공범이 되었던 일이 어린 마음에 상처이자 억울함으로 남아 있었다.
달빛 희미한 여름밤에, 한동네에 사는 친구 봄이가 찾아왔다.
친구라기에는 좀 서먹할 만큼 평소 오가는 일이 별로 없는 사이였지만, 웬일인지 대문 밖에서 다급하게 부르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나가보니,
“너, 잠깐 나 좀 따라와.” 하면서 앞장서 달리는 것이다. 무슨 일이냐고 묻고 말고 할 겨를도 없이 서너 걸음 뒤떨어져서 달려갔다. 어슴프레 앞서가는 그 아이가 얼마나 빠르게 서두르던지 금세 마을을 벗어나고 냇물을 건너 생전 가 본 적이 없는 언덕을 향해 단숨에 달려갔다.
“봄이야, 우리 어디 가는 거야?”
“.......”
원래 봄이는 나보다 한 살 더 많았고 달리기도 잘 하는 아이라 전혀 힘든 기색이 없었지만, 나는 쑥부쟁이가 종아리에 걸리는 낯선 길의 무성한 풀밭을 뒤따라가는 게 정말 힘들었다. 봄이는 위로 언니가 둘, 오빠가 둘이나 있어서 늘 언니 오빠를 믿고 영악하게 굴었으므로 어리숙한 나랑 어울릴 일이 없었는데 나는 바보같이 무조건 봄이를 따라간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가더니 갑자기 몸을 낮춰 쏜살같이 밭으로 들어갔다. 그제서야 봄이가 나에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
“너 여기에 숨어서 누가 오는지 좀 봐줘! 저기 원두막에 누가 있을지 몰라. 누가 이리로 오면 소리쳐, 알았지?”
얼마나 어리숙했던지 나는 그 때까지도 봄이가 무슨 짓을 할지 잘 몰랐다.
봄이는 몸을 낮춘 채 재빨리 밭을 돌아다니며 커다란 수박을 골라 미친 듯이 깨뜨려 먹다가 또 다른 수박을 깨뜨리고, 또 다른 수박을 깨뜨렸다.
그제서야 나는 봄이가 무슨 짓을 하는지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아! 어른들이 알면 붙잡혀 갈 텐데.... 큰일 났다!’
‘아니 수박을 먹으려면 하나만 따면 될 텐데 무슨 짓이야?’
그제서야 난 후회막심했지만 혼자 어떻게 집으로 돌아갈 길도 모르니, 그냥 막대처럼 서서 봄이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봄이는 실컷 밭을 돌아다니고 나서 물이 줄줄 흐르는 수박 한 쪽을 내게 내밀며 먹어보라고 했지만, 나는 괜찮다며 받지 않았다. 그 수박을 받아먹으면 큰 일이 날 거란 생각에 겁이 덜컥 났으니까 아무 생각이 없었다.
황급히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봄이는 딱 한 마디를 했다.
“지금 여기 왔던 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나는 대답 대신 침묵했다.
‘집에 들어가면 부모님은 내가 봄이랑 놀다 온 줄 아시겠지? 그렇지만 흙 묻은 신을 보면 뭐라고 하실지 몰라....’
농사일에 바쁘셨던 부모님은 고단한 잠에 빠지셨고, 다음 날에도 일찍 논밭에 나가셨으니 영영 이 일을 묻지 않으셨다. 부모님은 나의 오늘 밤 일을 상상도 못하셨을 테니까 마당에서 술래잡기나 하면서 놀았을 거라고 짐작하셨을 터였다. 만약 부모님께 이 일을 알린다면 봄이는 온 동네에 소문이 나서 엄청 혼이 날 게 뻔했다. 나는 정말로 그 아이의 비밀을 영영 지켜 주었다. 그러면서도 어른들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저 건넛마을 박 영감네 밭에 수박 도둑이 들었다네. 도대체 어떤 놈들이 그런 나쁜 짓을 했나 몰라... 아직도 도둑을 못 잡았다네.’
그런 말들을 하시지는 않는지 몹시 궁금했고, 만약에 누가 묻는다면 대답을 하리라 마음 먹었지만, 그런 소문은 끝내 들려오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게 바로 수박 서리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얼떨결에 수박 서리를 따라가서 망을 봐준 꼬마 공범자가 되었다는 게 가끔씩 생각날 때면 어른이 되어서도 마음이 께름칙했다. 그 일이 있은 후 봄이는 두 번 다시 나를 찾지 않았고, 같이 놀지도 않았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식모살이를 간 그 아이, 스무살 무렵 낯선 미국으로 건너가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뿐.....
다섯 살 무렵 어느 날, 엄마는 나를 데리고 엄마 친구 집에 놀러 가셨다.
그 아주머니는 우리 엄마 절친이시라 거의 우리 집에 안 오는 날이 없었으므로, 내가 엄마를 따라 그 집에 간 것은 처음이었다. 그 집에는 나보다 한 살 많은 옥이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방안에 어른들이 왁자지껄 시끄러운 틈을 타서 나를 뒤뜰로 데려갔다. 생전 처음 따라 간 그 집 뒷마당은 꽤 넓었고, 옥이는 나에게,
“너 여기 서 있어. 누가 오는지 잘 봐.”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그냥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신기하게도 옥이는 배를 하나 뚝 따서 나에게 들고 있으라고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배를 잘 들고 있었다. 옥이는 다시 배나무로 가서 배를 또 하나 따는 순간, 옥이 엄마가 나타나 천둥 같은 소리를 치며 너희들 매를 맞아야 한다고 야단치셨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배를 들고 벌을 서야 한다며 두 손을 위로 올리라고 하셨다. 아니, 아무 것도 묻지 않으시고 다짜고짜 손을 들라시니 그냥 손을 들고 있었다. 나는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몰랐다. 내가 배를 딴 것도 아니고, 그 뒤뜰에 배나무가 있는지도 몰랐는데, 옥이를 따라 배를 딴 아이로 오해를 받고 이렇게 손을 들고 벌을 서다니.... 참으로 억울했지만, 울지도 않았다.
바보! 난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리숙한 아이였던 것 같다. 남의 수박을 몰래 따 먹는다든지, 자기 집 배를 엄마 몰래 따 먹는 것을 알지 못했던 순진한 시절, 나는 의도치 않게 공범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이 어린 나의 마음에 상처가 되었고, 또 오해를 풀 길도 없어서 억울함으로 남아있었던 것 같다. 그 때 나는 왜 우리 엄마한테 똑바로 이르지도 못했는지 답답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순수했었다고 조금은 위로를 해본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 지능발달이 좀 느린 동네 아이가 소년원에 갔다 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아이는 초등학교만 나와 도시의 어느 공장에 취직을 했었단다. 어느 날 공장에서 만난 또래들이 그 아이를 데리고 가서 도둑질 망을 보라고 시켰단다. 순진한 그 소년은 망을 보았다는 죄로 공범이 되어 감옥살이를 하고 나왔다는 것이다.
‘아, 그렇구나! 직접 남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더라도 옆에서 망을 보는 것도 똑 같은 공범이 되는 거구나!’
수박 서리를 할 때, 몰래 배를 딸 때 그냥 따라가서 옆에 서 있었던 게 망을 본 거고, 그건 도둑질이나 마찬가지고...!
지금부터 육십오 년 전, 어린 날의 행동이 잘못됐다는 고백을 해야 마음이 후련할 것 같은 찝찝함과 그때의 억울한 감정이 동시에 씻어지지 않는 건 왜일까?
바보! 아무 것도 모르는 바보였으니 할 말은 없지만, 평생 유혹에 빠지지 않게 된 내 삶의 첫 경험들은 내게 단단한 교훈이 되었다. 헤르만 헷세가 어린 시절 어느 날 친구 집에서 몰래 아름다운 나비를 훔쳐와서 혼자 괴로워하다가 결국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남의 물건을 몰래 가져왔다가 양심에 따라 행동하게 된 것! 나는 헷세보다 더 어린 날,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르면서 실수했던 경험을 통해 어렴풋이 세상에 눈을 뜨고 있었다. 그 후로 나는 유혹에 휩쓸려 망을 볼 일도 없었고, 다시 망을 보지도 않았다.
혜송 김순희 시인, 수필가.
*<한국작가> 시, 수필 등단
*<스토리문학> 수필 등단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정회원
*경기도문인협회 회원
*포천문인협회 이사
*스토리문학 회원
*시집: '클림트의 겨울숲에서'
*포천문인협회 시화전 참여
*포천좋은신문에 시, 수필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