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 문학산책

이운순 작가의 隨筆 '굴레'

제4회 청향문학상 대상 작가, 2022년 제163회 『월간문학』 동화부문 신인작품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회원

글쓰기를 좋아하시는 포천 분들이라면 누구나 '포천 문학 산책' 란에 시와 산문, 수필 등을 자유롭게 발표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쓴 작품을 독자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포천 문학 산책'에 문학을 사랑하시는 분들의 큰 호응을 부탁합니다. 

 

이번 주는 한국문인협회 회원과 한국수필가협회 회원인 이운순 작가의 수필 '굴레'를 감상합니다. 수필가 이운순 작가는 포천 출신 문인으로 제4회 청향문학상 대상을 수상했고, 2022년 제163회 『월간문학』 동화부문 신인작품상을 수상했습니다. 

 

 

 

▲수필가 이운순 작가.

 

 

 

굴레

 

 

뻔히 알면서도 맥없이 빠져든다.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드는 늪인가, 넋을 놓고 앉아 헤어날 줄 모르니 보는 이의 시선이 곱지 않다. 어디 곱지 않은 게 시선뿐이랴, 무슨 못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아차’ 리모컨을 바쁘게 돌리지만 ‘또 야?’ 기어이 한 소리를 듣고 만다.

 

남자들이 스포츠채널 뉴스채널을 선호한다면 보통의 주부들은 드라마채널 쇼핑 채널을 좋아하리라. 쇼핑 채널은 왠지 귀가 남보다 얇은 내가 봐서는 안 될 것 같고, 축구 야구 빼고는 한 팀이 몇 명인지도 잘 모르니 only 미드 채널 영화채널만 고집한다.

 

대 감염증으로 마음 놓고 나다닐 수 없는 시절이니 TV에서 벗어나기가 더 어렵다. 주부의 본분을 망각할 지경은 아니지만, 핀잔을 들어가면서도 미드 굴레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나를 두고 바보상자에 몰입해 울고 웃는 아내가 철부지 아이 같은가보다.

 

헐렁하게 남는 시간은 그렇다 치고 노트북 앞에 앉아 글 작업을 할 때도 티브이를 켜는 버릇이 원죄다. 남들은 자기 계발을 꾀해 남는 잉여 시간을 알뜰히 활용한다는데 나는 대체 왜 이럴까. 집중력에 방해 요인이 분명한 나락에 자청해 빠져드는 꼴이니 대책이 없다.

 

주부의 본분도 글 짓는 일도 뒷전일 만큼 한 번씩 빠져드는 건 맞다. 혹시 내 입장 내 고집만 내세우는 걸까, 그렇다고 삼십 수년 함께 산 아내를 한심한 시선으로 바라보다니 그런 남편의 메마른 감성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부부의 취미가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집중하고 몰입해도 모자랄 지경에 TV소음을 음악처럼 들으며 자판을 두드리니 빈번하게 수정하느라 Delete 키와 Backspace를 눌러대니 딱할 노릇이다.

 

외화는 처음 볼 때 자막을 보고, 두 번째는 연기를 보고, 세 번째라야 비로소 편안하게 감상한다는 어떤 이의 말처럼, 자막 읽으랴 배우들 연기 보랴 스토리 이해가 더딘들 뭐 어떠랴. 자칫 이해도가 떨어질 상황이라도 감정이입이 누구보다 빠른 나는 배우보다 먼저 울고 배우보다 먼저 웃는다. 복잡하고 미묘한 우리네 삶과 담백하고 자유분방해 보이는 미국 사회나 비슷한 인간사에 또 놀란다. 신기하지 않은가.

 

이즈음 내가 반한 영화는 유색 인종차별을 다룬 ‘히든 피겨스’와 ‘그린 북‘이다. 내게 깊은 파문을 던져준 영화, 그 감동의 굴레에서 나는 한동안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나사 유리천장을 깬 흑인 여성들의 감동 실화’라는 영화평이 딱 맞는 여성영화, 그 시대에 숨겨진 세 영웅 흑 인여성들이다.

 

뛰어난 능력의 프로그래머 도로시 본, 천재적인 수학 능력자 캐서린 존슨, 흑인 여성 최초 NASA 엔지니어 메리 잭슨, 이 세 명의 흑인 여성은 인종차별과 불의, 편견에 맞서 싸워 이겨낸 여성 전사들이다.

 

영화 첫 장면에서 자동차 엔진 고장으로 멈춰 선 그들에게 의혹의 눈길로 다가온 백인 경찰, 이들이 제시한 NASA 사원증 확인 후 백인 경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나사로 향하던 그녀들의 출근길은 감동의 예시였다. 백인 직원들이 쓰는 커피포트도 함께 사용할 수 없고, 그들과 같은 화장실도 쓸 수 없다는 악습을 견뎌내고 있었다.

 

유색인 화장실을 찾아 800미터나 멀리 떨어진 곳으로 내 달리던 캐서린을 보며 나는 그녀의 방광이 걱정될 정도였다. 그녀가 자리를 비울 때마다 상관 리차드 기어(粉)가 뒤늦게 캐서린이 자리를 자주 비우는 이유가 나사 안에 만연한 유색인 차별이었음을 그제야 알게 된다. 그가 성난 얼굴로 화장실 표식을 떼며, ‘나사 안에 더 이상의 유색인 화장실은 없다’고 일갈하는 장면은 두고두고 통쾌하고, 감동이었다.

 

또 다른 감동 영화가 있다. 2019년 91회 미국 아카데미 3관왕에 빛나는 ‘그린 북’을 평한 평론가들의 한 줄 평이 인상적이다. ‘마법 같은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던가, ‘새해를 여는 가슴 따뜻한 감동 실화’라는 평만 보고도 기대감에 부풀었다. 백악관 연주회에도 초청연주를 했다는 ‘돈 셜리’ 박사는 흑인 천재 피아니스트다. 백인 우월주의가 팽배했던 60년대 초 그는 남부지역으로 피아노 앙상블 연주 투어를 기획한다.

 

토니 발레롱 가는 이탈리아 이민자로 낙천적인 데다 과장된 입담을 자랑한다. 흑인편견을 갖고 있었던 그에게 셜리 박사로부터 보디가드 겸 운전기사 제안을 받는다. 고용인이 흑인인 것도 가족을 장기간 떠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연주 여행 동반을 결정한다.

 

거친 인생을 살아온 토니와 교양과 기품을 지키는 셜리와의 특별한 여정이 그렇게 시작된다. 편견과 차별, 위험을 감지하면서 떠난 연주 여행, 백인 관객들은 셜리의 훌륭한 연주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지만 정작 자신들과 같은 식사 자리는 허락하지 않는다. 고급 양복점에도 갈 수 없고, 앙상블 동료들과도 함께 식사할 수 없는 모멸감을 참아낸다.

 

애초 불만투성이였던 토니는 온갖 불이익에도 최선을 다하는 연주에 감동했고, 아내에게 편지글을 쓸 때 건네받는 조언에도 점점 빠져든다. 기사 딸린 차를 타고 다니는 셜리를 보는 흑인 노동자들의 외부 시선도 차갑다. 그 불편한 시선을 애써 외면해야 하는 그는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이방인이었다.

 

여행 내내 그들에게 닥치던 인종 간의 보이지 않은 벽, 영화제목 ‘그린 북’이란 유색인의 여행가이드북이었던 것이다. 여행의 막바지, 흑인 전용 바에서 마음 편히 식사하고, 바에 가득 찬 흑인들만을 위한 셜리의 즉흥연주는 최고의 압권이었다.

 

여행 중 그들이 가장 편안해 보이고 가장 행복해 보인 시간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까지 토니를 그의 아내에게 돌려보내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졸음에 시달리는 토니를 뒷좌석에 재우고 돈 셜리 박사는 기꺼이 핸들을 잡는다.

 

눈 덮인 도로를 달려 기어이 따뜻한 불빛 아래 토니의 가정에서 벌어지는 성탄 이브 파티에 합류하는 감동그림은 영화의 극치였다. ‘크리스마스에 찾아온 특별한 우정’, 누군가도 나처럼 감동 굴레에 빠졌었던가, 그의 감상평 ‘두 번 세 번 보면 볼수록 감동의 크기가 더했다’는 한 줄 평이 또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2020. 겨울 作》

 

 

 

수필가 이운순

경기 포천 출생

문인권익옹호 위원

한국방송대 국문과 졸업

2008 계간 '에세이문예' 수필 등단

2022년 제163회 『월간문학』 동화부문 신인작품상 

본격수필 에사모 이사

사) 한국문인협회 회원, 사) 한국수필가협회 회원

정독수필, 달포회 청향문학회 회원

제4회 청향문학상 대상

15회 에세이작가상, 제8회 본격수필토론회 대상작가

송우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사업회 기념집 발간위원

수필집『비타민이 열리는 나무』 해드림출판사 2016

『향기는 바람에 섞이지 않는다』 해드림출판사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