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성 칼럼]워싱턴發 종이비행기

프로방스, 바람과 햇살 1

필자 김은성은 79년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민갔다. 메릴랜드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80년부터 96년까지 미국 소아과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다. 97년부터 병원 관리직과 소아산부인과 이사로 근무하다가 퇴직했다.

▲필자 김은성.

 

[편집자 주] 이미 예고드린 대로 포천좋은신문은 이번 칼럼부터 김은성 작가의 '프로방스 여행기'를 게재합니다. 세계 곳곳으로 독자 여러분을 안내하며, 음악과 미술 해설을 곁들인 유려한 필체로 여행기의 새로운 지평을 펼쳐가는 김은성 작가를 따라, 임인년 새해에 프랑스의 남부지역 프로방스를 감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여행은 은퇴한 사람들의 로망이다. 우선 건강이 허락해야 가능하고, 경제적인 여유와 동반자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동부에서 비행기로 6, 7시간 날아가면 유럽이고 대도시가 아니면 미국보다 물가도 싸지만, 현역일 때는 고국 방문에 모든 휴가를 쓰느라 여유가 없어서 못 가봤다. 퇴직한 후에는 어디로 어떻게 여행을 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다. 


그리고 유럽에 진출한 첫 번째 여행은 알프스 계곡 마을, 프랑스 샤모니에서 2주 머무는 거라고 즉흥적으로 정하고 무작정 떠났었다. 우연히 '걸어서 세계 속으로'에서 보고, 그곳에 가보고 싶어져서…라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그 여행에서 유럽에선 경치 좋은 곳에 숙소를 정하고 자동차를 빌리면 두세 시간 반경으로 가볼 만한 곳들이 많고, 자유롭고 느긋하게 그리고 저렴하게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짧은 기간 많은 곳을 보려면 이동하느라 힘들고 비용도 많이 들지만, 한곳에 머물며 가까운 곳들만 보는 편안한 여행이 더 경제적이고 기억에도 오래 남는다는 결론으로 은퇴 후 여행 스타일을 정했다. 


2017년 여름에는, 사진에서 본 보랏빛 라벤더 들판이 있는 프로방스로 가보기로 했다. 라벤더꽃이 필 즈음인 6, 7월에 더운 지역으로 3주 예정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한국에서 아파트 생활하는 친지들에겐 리조트 같다는 미국의 주거환경을 두고, 뙤약볕을 향하여 굳이 집을 떠난다는 게 문득 엄청난 사치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여행은 온몸과 영혼으로 읽는 책이니, 이런 기회가 허락된 것을 감사하며 여행을 준비했다.

 


 ▲이 사진을 보고, 무조건 프로방스로 가보기로 했다.

 
En Marche! France 도착, 6월 15일
 
목요일 밤 9시 워싱턴 디시를 출발, Air France 편으로 파리로 날아오니 금요일 아침 드골공항이다. Air France는 진정한 Vacation은 자기네 비행기를 타면서 시작된다고 자랑하길래, 수년 전 파리에서 미국으로 오며 타본 것 같은 럭셔리 Air bus를 기대했으나, 우리를 싣고 파리로 날아온 비행기는 오종종한 미국 비행기와 같은 기종이라 좀 실망했다. 게다가 오뉴월 불볕더위치고는 제법 많이 몸을 가린 옷을 입었건만, 기내가 너무 추워서 재채기 콧물감기 얹어서 비행기에서 내렸다.

 

70년대 서울 역전에서 테제베(TGV, 프랑스 고속철) 다방이란 간판을 봤을 땐, 프랑스 가서 그거 한번 타봤으면 했는데, 마침내 그날이 왔다. 다행히 공항에서 바로 기차로 갈아탈 수 있다. 요즈음 서울과 비교하면 낡고 비좁고 우중충한 기차 터미널에서 KTX보다 낡고 냄새나는 테제베 고속철을 타고 3시간 달리니 프로방스의 중세도시 아비뇽으로 데려다준다. 



▲파리에서 아비뇽은 700km 정도의 거리다. 프랑스는 국토가 꽤 넓다. 

 

고국에서 타본 깔끔한 신형 객차 KTX에 맞추어 높아져 버린 내 눈높이에 못 미치는 프랑스 고속철은, 얼마전에 타본 미국 기차에 비하니 그래도 여러 수 위다. 미국철도는 승객도 별로 없고 거북이같이 기어가지만, 테제베(TGV)는 만석으로 쌩 달려간다.

 

자동차로 7시간 달릴 거리를 3시간에 주파해주는 고속철, 미국엔 왜 없을까? 미국은 이상한 나라다. 나라가 너무 크다 보니 변화와 발전이 매우 느린 면도 많다. 워싱턴에서 보스톤을 고속철이 3시간만에 달려주면 비행기 안 타고 기차 탈 것 같은데, 미국은 고속철에 관심 없어 보인다. 


테제베로 프랑스를 거의 종단하며 창밖을 보니, 기름져 보이고 편만한 농토가 끝없이 펼쳐진다. 고대부터 먹을 거 걱정 안 해도 좋았을 듯한 국토다.  식량이 해결돼야 멋도 부리고, 문화도 일구고, 높은 콧대로 유명하게 잘난 척도 하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 유행하는 과자 마카롱과 비슷한 이름의 젊은 대통령과, 전진- 앞으로! (En Marche! 느낌표 포함하여 정당 이름이라고 한다) 라는 매우 선동적인 이름의 그의 새 정당이 싹쓸이 돌풍을 일으키며 새로운 프랑스 혁명을 주도하고 있다는데, 그런 건 잘 모르겠고 비행기 타고 기차 타고 산 넘고 물 건너 여기까지 왔으니, 나도 En Marche!  으샤으샤 잘 구경하다가 가겠다는 다짐이다. 

 


 ▲아비뇽의 기차역.
 
론(Rhone)강이 알프스에서 아비뇽, 아를 쪽으로 흐르는 계곡, 알프스 산맥의 자락이 병풍처럼 서 있는 곳의 남쪽에서 지중해까지 펼쳐진 남프랑스를 프로방스라고 하는데 요샌 Rhone Alpes Provence라는 행정구역으로 지칭된다고 한다.


3주간 프로방스 여행의 주거지, 베이스캠프를 아비뇽으로 삼은 것은, 기차역이 있고 대중교통으로 여행하기 가장 편리하다는 정보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중교통은 아무래도 귀찮다는 남편이 결국 자동차를 빌리는 바람에 이곳이 최선의 선택이었는지는 애매해졌다.


대중교통 이용 목적으로 정한 테제베 역전의 우리 숙소는, 위치로 그 가격을 다 하고 숙소 자체를 즐길만한 운치는 없는 곳인지라 즉흥적으로  급조된 여행의 티가 나기 시작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3주간 살아갈 살림을 대충 차려놓고, 고(古)도시 아비뇽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시차로 잃어버린 6시간으로 인하여 하루를 일찍 접어야 한다.

 

아비뇽, 바람불어 좋은 날 
 
아비뇽에서 제일 먼저 진하게 만난 것은 '미스트랄'이라고 불리는 바람이다. 미국을 떠나기 전 이곳 날씨를 알아보니 연일 화씨 90도 넘는다길래, 이번 여행엔 날씨 호사는 없겠군! 하면서 최대한 시원할듯한 옷만 챙겨왔다. 그런데 멀리 보이는 산 이름이 바람산(Mont Ventoux, 영어로 Windy mountain)이라서일까, 종일 선풍기같은 바람이 불어 햇살은 뜨거워도 상당히 쾌적하다. 


친구들과 같이 왔으면 깨워 주었을 텐데, 우리동네 시간으로 새벽 4시에 기상했으나 현지 시간으로 무려 10시까지 늦잠을 자버렸다. 아침에 다시 급조된 스케줄로 아를로 가보려던 계획 대신 아비뇽 구도시로 걸어 들어간다.  

 

석회암으로 지어진 중세 건물들로 가득한 언덕을 어슬렁거리니, 다른 아무것도 안 보고 이곳에서만 3주 있어도 좋을 거 같다는 충만함이 스며든다. 뜨거운 공기를 흔들며 계속 체감되는 바람에 매료되어 눈에 보이는 것들이 그리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 신비한 체험으로 여행의 첫날을 시작한다.

 


▲아비뇽의 교황청.

 

세계사 시간에 배운 아비뇽 유수, 14세기 초에 60여 년 동안 이곳으로 옮겨 와있던 교황청이 세운 도시라서 교황의 도시라고 보면 된다.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성곽 안에 가득한 유적들은 영어로 설명해놓으면 야단맞을까 봐 그러는지 몽땅 프랑스어로만 써놔서, 예습 복습이 필수다. 할 수 없이 숙소에서 열심히 공부하려니 너무 방대해서 힘들다. 1년에 4백만 방문객이 이 도시를 찾는다는데, 프랑스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대놓고 불친절한 나라이다. 


교황궁 뒤에 자리한 최고의 전망의 정원, Le Jardin des coms에서 내려다보니 론강과 바람산이 한눈에 보인다. 교황청이 있을 땐 지금 인구의 거의 2배가 이 도시에서 북적댔다고 하는 아비뇽에는 수백 년 세월이 담겨 있다. 역병이 창궐하고 인간의 수명이 짧던 중세보다 인구가 적어지다니 국소적인 현상이라도 신기하다. 


오늘은 아비뇽 대충 보기로 하루를 접고, 미스트랄을 느끼며 천천히 걸어서 숙소로 돌아온다.

 

▲교황이 거닐었을 전망 좋은 정원에서 바람산과 론강이 보인다.

 


▲아비뇽 사람들과 주택.

 

▲예쁜 기념품들.

 


▲인구 10만이 안 되는 시골 도시인 아비뇽의 제일 좋은 호텔이라는 La Mirande hotel. 티타임에 구경삼아 들어가 본다. 구석진 골목의 중세건물로 고색창연한 작은 호텔이다.